지난 겨울, 오랜만에 만난 지인으로부터 한 온라인 교회를 소개받았습니다. 그곳의 영적 전쟁에 대한 가르침은 처음엔 단순히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방법’처럼 들렸지만, 시간이 지나며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졌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십자가 구원이라는 더 큰 그림 안에서 바라보지 않고, 내 편안함만을 위한 도구로 삼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 고민 속에서 다시 찾아 읽게 된 것이 요한복음 20장이었습니다. 이 장은 단순히 부활 사건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두려움과 의심에 갇힌 제자들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까지 이어지는, 부활의 현실과 그 의미를 생생하게 전해줍니다.
잠긴 문을 뚫고 오신 평강
요한복음 20장 19절의 장면은 암울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정신적 지주를 잃은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해 문을 굳게 닫은 방 안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두려움과 실패감,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가득했을 겁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은 모든 물리적 장벽을 초월하여 그들 한가운데 서셨습니다. 그리고 첫 마디로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선언하셨죠.
이 평강은 단순히 ‘조용히 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샬롬(평강)’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전인격적인 구원과 회복, 완전한 상태를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외적 상황을 즉시 바꾸시지 않았습니다. 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고, 밖의 위협은 존재했죠. 하지만 그 한가운데 당신의 임재로 말미암는 참된 평안을 선물하신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이 부분이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우리 삶에도 문이 닫힌 것 같은 순간, 외부의 압박이 느껴지는 때가 있지만, 부활하신 주님은 그 어떤 장벽도 뚫고 우리의 현장 가운데 임하셔서 진정한 평안의 근원이 되어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해주죠.

보냄을 위한 성령과 용서의 권세
예수님은 평강을 선언하신 후,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주심으로 유령이 아닌 육체적 부활의 현실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선언을 이어가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절). 두려움에 움츠러든 이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신다는 선언입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향해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신 장면을 연상시키며, 새로운 생명과 사명 수행을 위한 능력을 부여하심을 상징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라는 용서의 권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23절). 이는 제자들이 스스로 죄를 사할 수 있는 신적 권한을 받았다는 의미보다,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는 길을 알리고 그 사실을 선언할 사명을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재미있는 점은, 이 모든 것—평강, 파송, 성령, 용서의 선포—이 제자들의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한가운데서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능력은 우리의 완전한 준비를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의심을 품어안으시는 주님
첫 번째 모임에 없었던 도마는 다른 제자들의 증언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는 확실한 물리적 증거를 요구했습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25절). 그의 태도는 비난받아 마땅해 보이지만, 사실 우리 안에도 있는 ‘도마적 요소’가 아닐까 싶습니다. 때로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보다 눈에 보이는 현실이 더 강력하게 느껴질 때가 있죠.
여드레 후, 예수님은 다시 한번 잠긴 문 안으로 들어오셔서 도마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도마가 요구했던 그대로, 손가락으로 만져보라고 자신의 상처를 내어주십니다. 여기서 느껴지는 것은 예수님의 엄청난 관용과 사랑입니다. 주님은 도마의 의심을 꾸짖거나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가 필요로 하는 방식으로, 그가 납득할 수 있는 증거를 친히 제공하셨습니다. 이에 압도된 도마는 요한복음 최고의 신앙 고백을 쏟아냅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8절).
그러나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도마를 넘어 오늘날의 우리를 향합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9절). 이 말씀은 직접 보지 못한 채 말씀과 증언을 통해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를 향한 축복의 선언입니다. 의심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의심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주님은 우리의 의심과 질문까지도 품어안으시고, 그것을 더 깊은 믿음과 고백으로 이끄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보냄 받은 자로서 오늘 내가 할 일
요한복음 20장을 읽으며, 제가 최근에 품었던 ‘하나님이 다 하실 수 있는데 왜 내가 해야 하지?’라는 어리석은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은 것 같았습니다. 무덤이 빈 것을 발견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사실만으로 집에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울면서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주님을 찾았고, 결국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만났습니다. 마리아의 그 ‘찾아감’이 중요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부활 후 모든 일을 단독으로 처리하시지 않고 제자들을 보내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라는 표현은 그 사명의 본질과 권위가 하나님에게서 나옴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과 아이디어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그 부르심과 권위 안에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우리의 사명은 우리의 완전함이나 두려움의 소멸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와 ‘평강’의 선포, 그리고 ‘보냄’의 명령에서 시작된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보냄 받은 자로서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반드시 멀리 타국에 가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내가 속한 가정, 직장, 학교, SNS라는 공간이 바로 ‘보냄을 받은 현장’입니다. 그곳에서 주님이 주신 평강의 말씀을 먼저 나의 마음에 새기고, 두려움보다는 주님의 임재를 의지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작은 용기로 진실과 은혜를 나누는 것이 오늘의 사명이 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도마처럼 의심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도마처럼 그 의심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 필요하겠죠.
믿음으로 이어가는 부활의 이야기
요한복음 20장의 마지막, 사도 요한은 이 책을 기록한 목적을 분명히 합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31절). 이 말씀은 이 장의 모든 사건—빈 무덤, 마리아의 만남, 제자들의 평강, 도마의 고백—이 궁극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데 있음을 선언합니다.
부활은 2천 년 전에 끝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믿는 자의 삶 속에서 평강을 선포하고, 의심을 품어안으며,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시는 살아있는 현실입니다. 우리는 직접 보지 못했지만, 그 말씀을 통해, 그리고 그 부활의 생명이 역사하는 공동체를 통해 복되다 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두려움과 의심의 방 안에 있을지라도, 주님은 늘 우리 한가운데 서서 ‘평강’을 선언하십니다. 그 음성을 듣고, 그 보냄을 받아들이는 것이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응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오늘 어떤 ‘잠긴 문’ 안에 있나요? 혹은 도마처럼 확실한 증거를 갈망하는 마음이 있나요? 그곳에서조차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평강과 보냄의 부르심이 여러분을 향해 있음을 기억해보세요. 그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하고 싶은지, 나누어 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